웹소설/그림자는 거짓을 입는다

《3화: 그림자를 삼킨 마을》

탐유 2025. 8. 30. 01:16

여전히 우리가 앉는 자리는, 서울 외곽의 그 허물어진 카페 구석이었다. 금 간 유리창으로 오후 햇빛이 비스듬히 기어들고, 낡은 소파는 엉덩이를 맡기면 천이 살짝 비명을 질렀다. 하늘은 테이블 위에 파일 더미를 펼쳐놓고, 스테이플러 자국이 가득한 신문 스크랩과 녹취록을 순서대로 나열했다. 운성 오빠는 물 한 모금도 삼키지 않은 채, 어두운 눈으로 차분히 자료를 훑었다.
왼쪽의 빛, 오른쪽의 빛. 둘은 오늘따라 말없이 더 가까웠다. 손등에 느껴지는 따뜻한 떨림이, “집중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두 달 새 네 명.” 하늘이 낮고 빠른 템포로 말했다. “○○군 ○○리. 증발하듯 사라졌고, 목격자는 ‘밤마다 웃음소리가 들린다’고 진술. 경찰은 치매·가출로 처리. 그런데—”
그녀가 녹취록을 내밀었다. 종이 가장자리에 커피 얼룩이 번져 있었다.

“…아이들 웃음 같기도 하고, 장난 같기도 한데… 다음날 사람이 없어졌소…”

종이를 읽는 동안, 오른편의 빛이 아주 약하게, 그러나 길게 일렁였다. 폐교에서 들었던 그 소리. 웃고 있는데, 웃는 게 아니었던 그 소리.
나는 숨을 길게 들이켰다. “같아. 그날과.”
운성 오빠가 고개를 들었다. “단순한 귀신 소문이면 계속 사라지진 않아. 그들이 움직이는 방식은… 먹잇감을 길게 고르는 법이거든.”
하늘이 나를 보았다. “언니가 본 ‘본질’이 이번에도 같은지 확인하자.”
그녀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누군가 마음의 문틈을 살짝 두드리는 느낌—하늘이 집중할 때마다 느껴지는 기척이었다.
나는 두 개의 빛을 살피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의 빛이 “맞아”라고, 오른쪽의 빛이 “가자”라고 대답하듯, 동시에 반짝였다.
“오늘 해 지기 전에 도착하자.” 운성 오빠가 일어섰다. “현장 공기는 밤이 되면 달라져.”


서울을 둥글게 벗어나자, 도시는 뒤로 미끄러졌다. 고가도로의 그림자 대신, 개울과 둑, 벼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차창을 통해 들어왔다. 버스는 오래된 등받이를 삐걱이며 흔들었고, 창문 틈으로 흙의 냄새가 들어왔다.
길이 길어질수록, 왼쪽의 빛이 조용히 내 손목을 감싸고, 오른쪽의 빛은 앞 유리 너머 먼 산들을 가리켰다.
거기야.
말이 아니라 감각으로 이해되는 신호. 나는 그 무언의 언어에 익숙했다.
하늘은 내 옆 좌석에서 태블릿을 두드렸다. “이상하지? 그 마을 SNS 게시글이 거의 없어. 최근 사진이 ‘없는’ 마을이라니, 2025년에? 이 정도면 의도적으로 지워졌거나, 무언가가… 아예 기록을 만들지 못하게 하거나.”
“오프라인으로 가둬두면 온라인 흔적도 연약해지지.” 운성 오빠가 앞좌석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사람을 마을 안으로 묶어둘수록, 바깥으로 새는 기운은 줄어들어. 그들은 늘 내부를 선호하거든.”
“그들은?” 하늘이 묻자, 운성이 짧게 대꾸했다. “은설이 설명 잘해줬어.”
나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귀신’이라고 부르는 것. 사실은 더 오래된 존재. 사람의 감정을 먹고, 그 감정의 모양으로 가면을 쓰지. 이번엔 ‘웃음’이 키워드일 거야. 가벼운 소리로 사람을 안심시키고, 깊은 곳으로 끌어들여.”
하늘이 팔짱을 끼었다. “웃음으로 유인이라… 제목부터 벌써 소름이네.”
그녀가 태블릿을 돌려주었다. 화면엔 희미한 포스터 사진. 접힌 종이에 흐릿한 QR코드와 한 줄 문구.

“밤 산책. 예전 운동장, 추억의 웃음.”

나는 이미지 위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오른쪽의 빛이 순간적으로 톡, 부딪쳤다.
이 냄새, 알아.
“저 QR, 접속 기록 있어?”
“없어. 게시자는 비공개 계정. 팔로워 0, 댓글 닫힘.” 하늘이 코웃음을 쳤다. “이건 사람 아닌 누군가가 ‘계정처럼 보이는 껍데기’ 만든 거야.”
버스가 마지막 정류장을 지나 마을 어귀에 멈췄다.


마을은 놀랍도록 정돈되어 있었다. 누렇게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담장 위로 흰 빨래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런데, 사람 그림자가 없었다.
개 짖는 소리도, 닭 우는 소리도 분명 있는데—인간의 목소리가 빠져 있었다. 소리의 배열에서 사람만 뽑아간 느낌.
“드라마 세트장 같다.” 하늘이 낮게 말했다. “액스트라 전부 퇴근.”
운성 오빠가 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주변을 훑었다. “눈 가는 데마다 사각지대가 많아. 집과 집 사이, 담장 뒤쪽, 수로 위. 누군가 의도적으로 ‘숨어 살라’고 가르친 듯한 구조야.”
“숨으면, 더 잘 잡히지.” 내가 말했다. “소리는 그럴 때 가장 먼 곳까지 퍼져.”
왼쪽의 빛이 내 발 앞 그림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른쪽의 빛은 골목 끝, 이장의 집 쪽으로 길게 가늘어졌다.
그쪽부터.
문은 오래된 철경첩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장은 우리를 보고 한참 말이 없었다. 곰팡이 냄새가 눅눅하게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서울서 왔다는 젊은 사람들이오?”
“네. 연락드린 대로, 사라진 분들 기록을 볼 수 있을까요.” 하늘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장은 떨리는 손으로 앨범을 꺼냈다. 싸구려 비닐 포켓이 끼익 소리를 냈다. 잔칫날 단체 사진, 논에서 웃는 얼굴, 마을 버스 앞에서 브이하는 손가락들.
그리고—어린 얼굴이 한 장.
나는 그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민호…”
입 안에서 이름이 맴돌았다. 우리가 보육원에서 함께 지내던 그 아이. 훗날 이 마을로 입양됐다는 소식을 먼 소문으로 들었던 그.
“그 아이도 두 주 전에 사라졌소.” 이장이 말하자, 하늘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나를 훑었다. 말없이 “괜찮아?”라고 묻는 눈.
나는 대답 대신, 왼쪽의 빛을 가볍게 만졌다. 빛은 내 손끝에 이슬처럼 맺혔다 사라졌다.
“사라진 분들 공통점이 있어요?” 운성 오빠가 물었다.
이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밤마다, 웃음소리가 들렸다오. 아이들 같기도 하고… 어른 같기도 하고… 그날이면, 누군가 나가. 그리고… 아침이 되면 없소.”
“집 문은?”
“잠겨있지.”
“발자국은?”
“없소.”
이장은 손을 떨었다. “없다는 게 더 무서워.”
나는 방 한가운데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오른편의 빛이 곁에서 일렁이며 방바닥 틈을 훑었다. 낡은 장판 가장자리, 창틀 아래, 벽의 못자국.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는 실들이 방 안의 공기를 가로질렀다.
연결선.
“웃음소리는 초대장이야.” 내가 말했다. “오래된 존재들이 사람을 밖으로 이끌기 위해, 그 사람의 기억 속 가장 가벼운 소리를 꺼내 흉내 내. 아이의 웃음, 어릴 적 소풍, 운동장.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지.”
하늘이 태블릿을 들어 화면을 보여주었다. 마을 게시판 사진. 낡은 종이에 흐릿한 QR코드가 붙어 있었다. “‘추억의 밤 산책’. 날짜는 사라진 밤들과 겹쳐.”
운성 오빠가 짧게 말했다. “운동장부터 보자.”


해가 기울 때 운동장에 도착했다. 흙은 잿빛으로 굳어 있었고, 철봉은 붉은 녹이 슬어 있었다. 깃발 꽂던 구멍에는 잡초가 자라 있었고, 먼지 타는 냄새가 아주 오래된 기계처럼 공기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와… 여기서 체육대회 했을 것 같은데.” 하늘이 카메라를 들이댔다. “해시태그 생각나네… #추억의_운동장 #밤산책_금지”
그녀는 농담처럼 웃었지만, 셔터 소리는 떨렸다. 하늘의 손목 안쪽 혈관이 얇게 튀었다. 그녀도 긴장하고 있었다.
나는 운동장 한가운데 멈춰 서서 눈을 감았다. 왼쪽의 빛이 어깨에 기댔고, 오른쪽의 빛이 바람을 가르며 앞서 나갔다.
바람이 잠깐 멈추는 순간—소리가 바뀐다.
먼 곳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밀려왔다. 환희에 찬 고함, 숨이 차서 터지는 웃음, 누구를 부르는 이름. 그런데 그 모든 소리 뒤에, 아주 낮은 ‘깔깔’이 깔려 있었다. 사람의 성대가 내지르는 구조가 아니었다. 마치 튜브를 타고 나온 공기 같은, 건조한 웃음.
“온다.” 내가 말했다.
첫 그림자가 기어들어왔다. 교실 창문이 없는 건물의 검은 공백에서, 누군가의 어깨가 먼저 나왔다. 얼굴이 늦게 따라왔다. 눈은 구멍처럼 비어있었고, 입가에는 너무 길게 찢긴 미소가 걸렸다. 얼굴의 재료가 사람인데, 표정의 설계도는 사람이 아닌 것.
그 얼굴은… 민호를 닮아 있었다. 나는 순간 발바닥이 시려졌다.
“민호.” 하늘이 아주 작게 불렀다.
그 ‘무언가’가 동시에 고개를 꺾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기억… 하고 있구나.”
등골을 타고 얼음물이 흘렀다. 보육원 밤의 그 목소리. 그날의 칠흑이 오늘의 황혼과 포개졌다.
운성 오빠가 앞으로 나가 섰다. “모든 방향에서 공격이 올 수 있어. 등지지 마.”
“오빠, 귀신 무섭잖아.” 하늘이 습관적으로 놀렸다.
“무섭다고 뒤로 안 물러난다고 했지.” 운성 오빠가 이를 앙다물었다. 그의 어깨선이 단단하게 솟았다.
그림자가 웃음을 터뜨리자, 운동장의 공기가 미세하게 파문쳤다. 모래 알갱이들이 안쪽으로 미끄러지듯 모였다.
중심.
오른편의 빛이 바닥 한 점을 콕 찔렀다.
“허상 말고, 바닥.” 내가 외쳤다.
그러나 그 순간, 왼편의 빛이 내 어깨를 스치더니 곧장 운성 오빠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윽… 뭐, 뭐야…!”
운성 오빠가 휘청하며 무릎을 꿇을 뻔했지만, 곧 눈을 부릅떴다. 눈동자 속이 은빛으로 번쩍였다.
“보인다… 드디어 보인다!”
그의 시야에 이제껏 허공 같던 그림자가 뚜렷하게 잡혔다.
운성은 이를 악물고 사다리를 움켜쥐었다.
이번엔 단순히 허공을 찍는 게 아니었다. 은빛이 그의 팔을 감돌며, 그림자의 본질을 정통으로 겨냥했다.
사다리 끝이 바닥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쾅—!
모래가 분수처럼 튀어 오르고, 어딘가에서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그림자의 웃음이 순간적으로 끊겼다. 그 대신, 흉복부 어딘가에서 아주 길게 뽑아내는 신음이 공기 속에 댕댕 울렸다.
그림자가 형체를 비틀었다. 민호의 얼굴 가면이 찢어져 나가더니, 이어지는 건 낯선 수많은 얼굴의 파편. 우리가 잊은 동창, 오래전 광고 속 미소, 응원단의 환호… 가벼움의 조각들이 용접된 괴상한 마스크가 연속으로 번쩍였다.
하늘이 숨을 삼켰다. “기억을 훑고 있어. 사람마다 다른 ‘웃음’의 모양을 꺼내 맞추고 있어.”
왼쪽의 빛은 이미 운성 안에서 불타고 있었고, 오른쪽의 빛이 내 손등을 두드렸다. 지금이야.
나는 발밑의 모래 감각을 갈라잡고, 숨을 길게 내뱉었다. “네 모습, 알아.”
그 말이 공기 중으로 나갔을 때, 그림자의 표정이 잠깐 휘청했다.
“우릴 기억한다면서, 정작 네 정체는 숨기고 있네.”
그 순간, 그림자가 전신을 늘렸다. 현수막처럼 얇아졌다가, 다시 갑자기 탄성으로 튕겨 우리를 덮쳤다.
운성 오빠가 몸으로 나를 밀쳐내며 앞으로 굴렀다. 그의 손에 들린 사다리 끝이 다시금 모래의 중심을 찍었다.
쾅!
이번엔 모래 밑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며 바람이 반대로 휘었다.
“지금!” 하늘이 소리쳤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내 쪽으로 던졌다. 깨진 거울 조각.
나는 반사적으로 그 조각을 들어 그림자의 얼굴—아니, 그 가면들을 향해 들이대었다. 거울 속에서 그림자는 자신의 ‘얼굴’을 처음 본 것처럼 움찔했다.
웃음이 꺾였다. 조용해진 공기 속에서, 아주 작고 맑은 소리로 내 오른쪽의 빛이 딸깍, 금속처럼 울렸다.
그림자는 길게 비명을 지르며 산개했다. 그리고 운동장 모래 위에, 검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다섯 손가락이 사람처럼 보이지만, 각 지문이 동심원 대신 ‘입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웃고 있는 모양의 지문.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운성 오빠는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빛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와 다시 내 어깨로 돌아왔다. 은빛이 사라지자, 그의 어깨가 무겁게 떨어졌다.
“허억… 몸이… 불타는 것 같아…”
그의 손등에 식은땀이 맺혔다.
나는 그의 등을 붙잡으며 낮게 말했다.
“빛은 오래 못 버텨. 무리하면 네 몸이 먼저 부서져.”
운성은 헛웃음을 지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이게 훨씬 낫다. 도망만 치는 것보단.”하늘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손이 떨렸지만, 그녀는 해시태그를 중얼거렸다. “#웃는_지문 #운동장_밤 #소녀퇴마단… 이건 진짜 바이럴 각인데, 올리면 안 되지.”
“올리면, 더 많은 초대장이 만들어져.” 내가 고개를 저었다.
하늘은 입술을 깨물고 카메라를 내렸다. “알아. 그래서 내가 기록하는 거지, 퍼뜨리려고가 아니고.”
운동장 옆 교실의 깨진 창으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오며, 오래된 분필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창틀로 걸어갔다. 의자와 책상 잔해 사이, 칠판 아래 바닥에 낡은 전단지가 쌓여 있었다.
<행복한 마을 만들기>
<추억의 밤 소풍>
<웃음 치료 강좌>
모두 같은 서체, 같은 인쇄소, 같은 QR 복사.
“웃음을 키워드로 마을 전체를 그물처럼 엮은 거야.” 내가 말했다. “사람들이 ‘가벼운 자리’로 모이는 밤을 만들고, 그때 사람의 경계는 가장 얇아지지. 그 얇아진 틈으로—들어오는 거야.”
하늘이 전단지 뒤를 비추어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뒤에 스탬프 같은 게 있어. 눈금 없는 원 두 개가 겹친 모양… 링.”
왼쪽의 빛이 잠깐 떨렸다.
알아. 오래된 표식.
나는 손끝으로 그 스탬프를 더듬었다. 우리의 세계와 저쪽의 세계를 연결하는 오래된 매듭.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된 설계도.
해가 완전히 지고, 마을의 등불이 한두 개씩 켜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등불의 색이 미묘하게 누렇다. LED가 아니라 석유램프처럼. 시간감각을 흐리게 만드는 색온도.
“더 깊은 데가 있어.” 운성 오빠가 말했다. “운동장은 초대. 메인 무대는… 저쪽일 거야. 뭔가 느껴져 빛이 들어온뒤로...”
그가 고개를 돌려 가리킨 곳—논두렁 사이의 수로였다. 어둠 속에서 물의 검은 표면이 아주 얇게 떨리고 있었다. 물은 흐르지 않는데, 파문만 번졌다. 마치 아래에서 무언가 숨 쉬고 있는 것처럼.
“지금 들어가면 위험해.” 하늘이 나의 손목을 잡았다. “오늘은 이 정도로 동선 파악하고, 내일 새벽 역광 상태에서 다시 보자. 그때가… 진짜 얼굴이 드러나는 시간일 수도 있어.”
하늘의 손길이 살짝 떨렸다. 그녀도 압도당하고 있었다. 밝은 말투와 달리, 골격은 냉정했다. 그래서 하늘은 강했다.
나는 왼쪽과 오른쪽의 빛을 번갈아 보았다. 둘 다 같은 답을 했다.
지금은 멈춰. 살아서 돌아가. 그래야 다시 온다.
우리가 운동장을 빠져나올 때, 등 뒤에서 아주 낮은 웃음소리가 길게 끌렸다. 바람이 걷어간 것 같았지만, 그 말은 분명히 남았다.
“기억… 하고 있구나.”
그리고, 아주 작은 속삭임.
“다음은… 더 깊은 곳으로.”


이장의 집을 다시 나설 즈음, 하늘은 오래된 라디오를 슬쩍 빌려왔다. “주파수 녹음할게. 밤 사이 파형에 이상 있으면 틈이 열리는 시간대가 떠.”
운성 오빠가 못질을 새로 해주고 라디오를 창가에 두었다. “창문은 닫아두되 빗장은 걸지 마요. 소리가 막히면, 반대로 다른 게 더 크게 들어오기도 하거든요.”
이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젊은 사람들… 고맙소.”
집을 나서며, 나는 신발끈을 고쳐 묶었다. 그 자세로 잠깐 고개를 숙일 때, 내 왼편과 오른편의 빛이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왼쪽은 조용히, 오른쪽은 조금 성급히.
“응.” 나는 아주 작은 소리로 답했다. “알아. 나도 무서워.”
하늘이 들을 리 없는 소리였는데, 그녀가 불쑥 물었다. “언니, 지금 왼쪽한테 투덜댔지?”
나는 웃었다. “혼잣말.”
하늘이 따라 웃었다. “나도 가끔 해. 근데 난 대상이 많아. 카메라, 구름, 알고리즘, 그리고—사람 마음.”
그녀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눈으로 한참 나를 봤다. “민호 때문에 흔들리면… 내 어깨 잡아. 내가 균형 잡아줄게.”
운성 오빠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우리 옆으로 걸어왔다. “내 어깨도 있다.”
하늘이 그를 훑었다. “오빠는 귀신 무서워하잖아.”
“사람 무섭지, 귀신이 무섭냐.” 그가 말했지만, 말끝이 살짝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이 고마웠다. 겁이 있으면서도 앞으로 내딛는 사람. 그런 사람의 결정이야말로 가장 믿을 수 있었다.


밤. 마을의 등불은 여전히 누렇다. 우리는 여관 대신 마을회관 구석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바닥은 차갑고, 벽은 습했다. 바깥에서 달그락, 누군가 양동이를 끄는 소리가 났다.
나는 눈을 감았다. 두 개의 빛은 내 옆에서 숨을 쉬었다.
그때—감겨 있던 눈꺼풀 뒤로, 물결 모양의 그림자가 지나갔다. 검은 물 위를 걷는 가벼운 발자국 소리. 그리고, 아이들 웃음. 너무 익숙해서 낯선 소리.
언제나처럼, 왼쪽의 빛이 속삭였다. 우리는 끝까지 함께 있을 거야.
그리고 이번엔, 오른쪽의 빛이 덧붙였다. 더 깊은 곳까지 간다.
나는 대답 대신, 숨을 아주 천천히 내보냈다.
이 마을은 웃음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가볍다는 건 때때로 가장 무거운 덫이다. 내일, 우리는 물 아래의 문턱을 넘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또다시 그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기억… 하고 있구나.”
나는 눈을 떴다. 하늘은 노트에 뭘 적고 있었고, 운성 오빠는 벽에 기대 잠시 눈을 붙였다가 금세 깼다.
“내일.” 그가 낮게 말했다.
“응.” 내가 답했다.
왼쪽과 오른쪽의 빛이 동시에 끄덕였다. 어
둠 속에서도, 그들의 존재는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