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그림자는 거짓을 입는다

2화. 다시 모인 우리, 그리고 폐교의 그림자

탐유 2025. 8. 23. 00:21

여덟 해가 흘렀다. 보육원에서의 그날 밤 이후, 우린 각자의 길을 걸었다.
 
운성 오빠는 경찰특공대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민간 보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단단한 체격에 묵직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가까이서 보면 눈빛에는 늘 뭔가를 경계하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늘은 대학에서 심리학과 사회학을 전공하며, 동시에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으로 수많은 기묘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밝은 수다쟁이 같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깊은 정보를 파악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여전히 두 개의 빛과 함께였다. 왼쪽과 오른쪽, 나만 볼 수 있는 보호의 빛. 그 빛들은 묵묵히 나를 따라다니며 나와 함께 숨을 쉬었다.
 
서울 외곽, 허물어진 카페 한 구석. 창문은 금이 가고, 낡은 가죽 소파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기울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앉아, 다시 마주했다.
 
“오랜만이네.”
운성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무겁게 울렸지만, 어릴 적 보육원에서 우리를 지켜주던 단단한 기운 그대로였다.
 
하늘이 곧장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언니, 여전히 그 빛이 보여?”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왼편과 오른편에서 두 개의 빛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보육원에서 그사건...언니가 그랬지?! 귀신이 아니라고 그럼 이번 사건...우리 셋이 같이 풀어야 해.”
하늘은 두툼한 파일을 꺼내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노랗게 빛이 바랜 신문 스크랩, 인터넷 기사 캡처, 주민들의 인터뷰 메모가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사건은 오래된 폐교에서 시작됐다. 삼십 년 전, 큰 화재가 일어나 학생 여러 명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이후로 매년 같은 날짜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는 괴담이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귀신이라고 하지.”
운성이 낮게 말했다. 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두 손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나는 신문에 실린 불타버린 교실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검게 그을린 벽, 깨져버린 창문, 그리고 뒤엉킨 책상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끈적한 기운이 피부에 달라붙는 듯했다.
 
“죽은 아이들의 귀신이 아니야. 저건…”
내 입에서 무심히 말이 흘러나왔다.
 
두 개의 빛이 동시에 떨렸다. 마치 내 생각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언니, 언니가 본 걸 말해 줘.”
하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내 깊은 속을 꿰뚫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단순한 집중이 아니라, 내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작동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날 보육원에서도 그랬지. 사람들이 ‘귀신’이라 부른 건 사실 태초부터 이 땅에 있던 것들이었어. 이번도 마찬가지일 거야. 인간의 공포를 먹고, 불타 죽은 아이들 흉내를 내는 거지.”
 
운성이 묵묵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방을 둘러맸다.
“그럼 확인하러 가자. 밤이 되기 전에.”
 
폐허가 된 학교는 잡초와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교문은 녹슬어 삐걱이며 열렸고, 운동장 흙은 잿빛으로 굳어 있었다. 기왓장은 떨어져 나가 있었고, 창문 틈마다 거미줄이 치렁치렁 매달려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는 눅눅하고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는 오래된 종이와 부서진 의자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잔해들이 끽끽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와… 진짜 분위기 장난 아니다.”
하늘이 카메라를 꺼내 연신 사진을 찍었다.
“#오늘도_현실_공포 #소녀퇴마단 #인생샷_각”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SNS 해시태그라니.
 
해가 기울자 교실 창문 너머로 희미한 불빛이 어른거렸다. 아이들 그림자가 웃으며 교실 안을 뛰노는 것처럼 보였다. 깨진 창문 틈새에서 어린 목소리들이 뒤섞여 흘러나왔다.
 
“저건… 환영이야.”
내가 속삭였다. 두 개의 빛이 내 어깨 옆에서 또렷하게 떠올랐다.
 
하늘은 셔터를 연달아 눌렀지만 카메라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언니 눈에만 보이는 거야.”
그러고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근데… 웃으면서 속으로 뭐라 했는지 내가 들었어. ‘기다렸어’래.”
 
순간, 차가운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영적인 존재의 기척과, 하늘이 읽어낸 마음이 완벽하게 겹쳐졌다.
 
그때, 교실 문이 삐걱이며 스스로 열리더니, 거센 바람이 복도를 휘몰아쳤다.
운성이 앞으로 나섰다.
“나한텐 안 보여도, 공격하면 대응할 수 있어. 은설, 신호만 줘.”
 
나는 숨을 고르고 그림자의 본질을 바라봤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흉내 내는 형체 없는 존재. 검은 눈이 내 쪽으로 돌아섰다.
 
“기억… 하고 있구나.”
 
공기가 요동쳤다. 교실 벽에 걸린 낡은 칠판이 쾅 하고 떨어지며 흙먼지가 튀었다. 운성이 팔로 우리를 막아냈다.
 
“언니!”
하늘이 날 불렀다. 목소리에는 분명 두려움과 흥분이 섞여 있었다.
 
나는 두 개의 빛을 따라 그림자의 본질을 응시했다. 그 순간, 존재의 껍데기가 일그러지며 속살이 드러났다. 타버린 아이들의 형상을 흉내 내고 있었지만, 그 속엔 끔찍하게 뒤틀린 형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귀신이 아니야. 태초부터 있던… 기생하는 자들.”
 
그림자가 몸을 늘려 우리를 삼키려는 순간, 운성이 앞으로 돌진해 의자를 잡아 휘둘렀다. 철제 다리가 공기를 가르며 허공을 찍자, 그림자의 몸이 갈라지듯 일그러졌다.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오고,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며 바닥에 흩어졌다.
 
운성은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젠장… 귀신은 역시 싫다니까.”
하늘은 순간에도 비웃듯 중얼거렸다.
“오빠, 몸은 용사인데 멘탈은 쫄보네.”
 
한참의 소동 끝에 그림자는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다. 교실 한쪽 벽에 검게 그을린 손자국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우리가 여기 있었다’는 낙인처럼.
 
하늘은 사진기를 들어 손자국을 찍으며 중얼거렸다.
“사라진 게 아니야. 우리를 시험하는 거야. 기억하는 우리가 다시 모였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지.”
 
나는 무심히 왼편과 오른편의 빛을 바라봤다. 빛은 여전히 흔들림 없이 내 곁에 있었다.
 
운성은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의 먼지가 흩날렸다.
“그럼 이건 시작일 뿐이라는 거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다시… 그들을 마주하게 될 거야.”